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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도




"네 마리의 형제 새가 있소. 네 형제의 식성은 모두 달랐소. 물을 마시는 새와 피를 마시는 새, 독약을 마시는 새, 그리고 눈물을 마시는 새가 있었소. 그 중 가장 오래 사는 것은 피를 마시는 새요. 가장 빨리 죽는 새는 뭐겠소?"

"독약을 마시는 새!!"

 고함을 지른 티나한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 보자 의기양양한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케이건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눈물을 마시는 새요"

언제나 무덤에서 돌아왔다고 첫글에 대한 코멘트를 다는 이영도 님의 '눈물을 마시는 새'입니다. 저번에 '폴라리스 렙소디'에 이어서 계속해서 이영도님의 글을 보고 있습니다.

평가절하 되기 쉬운 판타지를 문학의 위치까지 끌어올렸다는 평을 듣는 이영도님, 글 자체의 마력이 대단합니다.
 톨킨류의 판타지만 존재하는가? 라는 여론에 답을 하듯이 한국형 판타지를 구상하고 만들어 냈습니다. 특히나 '퓨쳐워커' 이후로 내려오는 중심인물이 누구일까 계속해서 유추하게 만드는 스타일의 진행방식이 더욱더 몰입도를 가져오고 그 것이 가져오는 반전을 즐기게 만들게 합니다.

너무 중요해서 몸안에만 가지고 있으려고만 하지 밖에 내보내지 않으려 하는 '피'를 마시는 새는 당연히 오래 살 수밖에 없고, 얼마나 해로우면 몸밖으로 내보낼려고 노력하는 '눈물'을 마시는 새는 일찍 죽을 수밖에 없다고 작가는 말합니다. 그렇지만 그렇기 때문에 '눈물'을 마시는 새는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눈물을 마셔서 , 일찍 죽는 새가 바로 왕이라고 작가는 말합니다. 왕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왕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왕이라고 떠받드는 존재들이 있어야 왕으로서 군림할 수 있습니다. 어찌하여 떠받들게 하는가? 바로 그들의 눈물을 마셔주기 때문에 떠 받들여 질수가 있습니다.

판타지 문학에서나 가능한 일일까요? 현실의 정치적인 모습이 더욱더 타락해 가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문학에서나 이상적인 왕을 찾아보게 되는 무력함을 느끼지만 , 그렇기에 더욱더 현실에서 '눈물'을 마셔주는 왕을 기대하는 환상을 꾸게 되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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