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암사
   오강남 풀이

'북쪽 깊은 바다'에 물고기 한 마리가 살았는데, 그 이름을 곤(鯤)이라 하였습니다. 그 크기가 몇천 리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이 물고기가 변하여 새가 되었는데, 이름을 붕(鵬)이라 하였습니다. 그 등 길이가 몇천 리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한번 기운을 모아 힘차게 날아오르면 날개는 하늘에 드리운 구름 같았습니다. 이 새는 바다 기운이 움직여 물결이 흉흉해지면, 남쪽 깊은 바다로 가는데, 그 바다를 예로부터 '하늘 못(天池)'이라 하였습니다. 

   소요유(逍遙遊)편 -장자(莊子)


중국의 고전들은 처음에 나오는 내용이 전반적인 내용의 핵심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이유로 장자에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 '소요유'편에 담겨 있습니다. 그 주제는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변화의 가능성과 그 실현'입니다. 사람이란 존재도 이런 변화를 통해 곤(鯤)이 붕(鵬)이 되는 '초월적인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존재가 어떻게 하면 될 수 있는가에 관한 내용이 바로 '장자'의 핵심이라고 봅니다. 

저는 장자를 두번 봤습니다. 어린 시절에 뭣도 모르던 바로 그 시절에 노장 사상이 도교의 근간인 것을 알게 되어서 혹시 보고 나면 무공에 대한 깨달음이 있지 않을까? 라는 말도 안되는 생각에 빠져서 읽었었고 (당연히 제대로 읽었을 리가 없었겠지요..) 근래에 다시 한번  읽으니 위대한 책이란 나이대마다 느껴지는 바가 다르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요즘 다시 읽어보니 자연 안에서 순응하여 인간이 가진 한계를 초월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니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정신적인 깨달음이 중요한 경지에 이른 무도가에게 좋을 수도 있다는 말도 안되는 생각을 이 나이대에도 하게 되는군요 

저에게 사촌 형님이 계십니다. 예전에 시인이셨고 현재는 교수님을 하고 계시면서 동시에 시인이신 형님이 어느날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과학과 문학이 같지 않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물어봐도 알 것이다. 하지만 과학도 올바른 마음가짐을 가지지 않고 접근한다면 원하는 성과를 이루어 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그렇기에 장자를 곁에 두라고 말해주고 싶다. 가끔 마음이 산만하여 집중이 안될 때 뽑아서 한 구절 한 구절 아무 편이나 보다 보면 마음을 다스리는 효과가 탁월하다" 

그 후로 추천 받았던 '현암사'의 '장자'를 책장에 꼽아두고 잘 읽지 않다가 무슨 바람이 일었는지 읽게 되서 몇 마디의 글을 남깁니다. 

문혜군이 말했습니다. "참, 훌륭하도다. 기술이 어찌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

요리사가 칼을 내려놓고 대답했습니다. "제가 귀히 여기는 것은 도입니다. 기술을 넘어선 것입니다. 제가 처음 소를 잡을 때는 눈에 보이는 것이 온통 소뿐이었습니다. 삼 년이 지나자 통째인 소가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신(神)으로 대할 뿐,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감각 기관은 쉬고, 신(神)이 원하는 대로 움직입니다. 하늘이 낸 결을 따라 큰 틈바귀에 칼을 밀어 넣고, 큰 구멍에 칼을 댑니다. 이렇게 정말 본래의 모습에 따를 뿐, 아직 인대나 건을 베어 본 일이 없습니다. 큰 뼈야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습니까? 

훌륭한 요리사는 해마다 칼을 바꿉니다. 살을 가르기 때문입니다. 보통의 요리사는 달마다 칼을 바꿉니다. 뼈를 자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19년 동안 이 칼로 소를 수천 마리나 잡았습니다. 그러나 이 칼날은 이제 막 숫돌에 갈려 나온 것 같습니다. 소의 뼈마디에는 틈이 있고 이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 없는 칼날이 틈이 있는 뼈마디로 들어가니 텅 빈 것처럼 넓어, 칼이 마음대로 놀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19년이 지났는데도 칼날이 이제 막 숫돌에서 갈려 나온 것 같은 것입니다."


'장자' 의 포정각우 (庖丁解牛) 부분에 나온 내용입니다. (리눅스에서 글을 쓰니 '포' 자가 깨지는 군요..) 
단지 소잡는 기술이지만 그를 행함에 있어서 '도'를 느낀다는 이야기에 백정이지만 일국을 다스리는 군주가 감탄을 한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에 나와 있는 내용을 보자니 문득 '도'를 수련하는 단계에 대한 생각이 떠 오릅니다.

불교 용어에서 건너와 무도 수행의 단계를 표현하는 말로 정착되었다. ‘수(守)’란 ‘가르침을 지킨다’라는 의미. 스승의 가르침을 받들어 정해진 원칙과 기본을 충실하게 몸에 익히는 단계를 말한다. ‘파(破)’는 원칙과 기본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그 틀을 깨고 자신의 개성과 능력에 의존하여 독창적인 세계를 창조해 가는 단계이다. 그렇지만 이 시기의 수련은 다분히 의식적이고 계획적이고 작위적인 수준에 행해지는 것이 특징이다. 다음 단계인 ‘리(離)’는 파의 연속선상에 있지만, 그 수행이 무의식적이면서도 자연스러운 단계로 질적 비약을 이룬 상태이다. 자신도 모르게 ‘파(破)’를 행하되, 모든 면에서 법을 잃지 않고, 규칙을 벗어나지 않는 경지에 이름을 뜻한다. 수련의 최후단계이다. 


개발기술 또한 단지 방법의 영역이지만 그것을 열심히 갈고 닦는 다면, 도의 경지를 못 느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소잡는 기술 이 '도'의 경지로 승화 될 수 있다 하지 않았습니까? 

개발 기술의  '수(守)' 란 닥치는 대로 기술을 익히는 단계와도 비슷하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저런 기술을 마구 마구 공부하고 배우는 단계입니다. 

개발 기술의 '파(破)' 란 전 단계인 '수' 에서 익힌 기본 기술을 기반으로 해서 의식적으로 자유롭게 개발을 할 수 있는 상태며 

개발 기술의 '리(離)' 란 무의식적으로 어떠한 프로그램을 짜야 겠다고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개발을 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닐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일조 일석에 이러한 개발의 도를 느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저 또한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개발을 수련할려고 마음 먹고 공부하지만 아직도 '수'의 단계를 못 벗어 난게 아닐 까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거듭되는 깨달음으로 최근 '파'에 근접한 거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다만 이제 개발을 시작하시는 분들은 바로 '파' 단계로 진입을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지루하고 괴로운 '수'의 과정을 거쳐야지만 파격을 시도할 수 있는 단계로 진입을 하는 것이지요. 추사 김정희의 추사체는 서도에 처음 뛰어드는 사람에게 절대 안 보여주는 이유도 같을 것입니다. 실제로 김정희는 자기 자식에게 보여줄 책은 인쇄한 것과 다름 없는 수준의 정자체로 글을 남겼습니다.

아무리 기술의 발전이 빠르고, 자신의 마음이 급해도 자기 수준에 걸맞는 기술을 익힐려면 지루하고 괴로울 지라도 반복, 반복해서 자신의 몸에 체득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혹시 누가 알겠습니까? 개발의 최종단계에 이르러 '도'를 느끼고 개발을 끝내면 온 몸에 기운이 차 오르는 '양생(養生)'의 단계를 느끼게 될지..

 
장자에 따르면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야 하는데

졸린데 일어나야 하고 ,
출근하기 싫은데 나가야 한다면

먹고사는 문제가 도를 이기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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